앞서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현실이 아닌 '이상향'을 심어준다고 이야기했다. 아이들에게 심어진 '이상향'은 아이에게는 꿈으로, 어른에게는 추억으로 자리잡아 다양한 캐릭터산업에 부를 축적해주고 있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렇다면 다소 허황스러운 이상향이 아닌 보다 '현실의 문제'에 집중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없을까?
있다. 바로, 일본의 스튜디오 지브리가 그러하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제작한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인 '톱 크래프트'를 모체로,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을 목적으로 1985년 6월 15일에 도쿠마 서점의 출자로 주식회사로서 설립되었다고 한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명칭은 사하라 사막에 부는 열풍을 뜻하는 리비아어 'ghibli'에서 유래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의 비행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각에서 '지브리'가 되었으나, 원어에 가까운 발음은 '기블리'라고 한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스튜디오 지브리의 마크는, 위에 넣은 사진처럼 <이웃집 토토로>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토토로'가 디자인되어 있다.
지브리의 로고로도 사용되는 토토로 같은 만화만을 단순히 생각할 때 "스튜디오 지브리가 사회구조적인 메시지를?"하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우선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작, <모노노케 히메>란 작품을 살펴보자.
일단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포스터의 소녀는 '산'으로, 사람들에게 버려져 들개들 사이에서 자라나 그들의 삶의 터진인 자연을 위해 인간들과 싸움을 벌인다. 그러던 중 인간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재앙신의 습격을 받아 오른팔에 죽음의 각인이 새겨져 죽음의 저주를 받아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서쪽으로 여행을 하던 아시타카를 만나게 된다. 아시타카는 산과 싸움을 벌이던 마을에서 지내게 되는데, '철'을 이용한 무기를 생산하며 주변의 자연을 망가뜨리는 광경을 보게 된다. 자연과 인간들의 싸움은 격해지고..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목이 잘린, 모든 자연을 관장하는 신인 시시가미가 분노하여 재앙의 신이 되어 모든 것을 삼키려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자연이 옳고,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철'을 생산하여 무기를 제조하는 마을의 우두머리인 에보시는 단순히 인간의 욕심만으로 자연을 위협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그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모든 남성과, 여성, 그리고 특히 전염병으로 몸이 불편한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 마을을 꾸려나가고 있던 것이고, 그러한 마을의 완벽한 체계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철을 생산하던 것이었다. 철저히 계획된 마을의 분담과 목표, 이상을 위한 무기 생산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연에게 해를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라는 탄식이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디즈니에서 등장하는 '악'은 선의 입장에서 꼭 없애야 하는 '절대적인 악'이지만, 지브리의 '악'은 '절대적인 악'이 아닌 '오해'와 '생존', 그리고 '구조'의 문제 사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즉,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선이거나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 모노노케 히메의 에보시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마을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 다른 측면을 해하게 된 것이고, 작품에서 제일 처음 재앙신이 된 멧돼지도 인간에게 입은 이유있는 증오로 인해 폭주했던 것이다. 이후의 시시가미 또한 마찬가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살펴보자. 하울의 움직이는 성 작품 내에서는 전쟁 중이다. 하울은 전쟁의 무기로써 동원된 마법사일 뿐이고, 실상은 겁쟁이이자 전쟁을 싫어하는 인물이다. 하울이 만들어낸 움직이는 성은 외부와 단절되는 하울의 안식처이자, 하울이 무서워하는, 싫어하는 전쟁의 도피 장소이다. 특히 하울이 머무는 자신만의 공간은 수많는 황금들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로 장식된 자신안의 세계에 갇힌 공간인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이 일어나는 외부적인 공간과는 반대되는 공간이다.
중간에 하울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캘시퍼와 계약을 하게 되는 공간이 나오는데, 이는 하울의 내면에 있는 순수의 공간이다. 하울이 캘시퍼와 계약을 하게 되는 것은 별똥별이 되어 떨어지면 소멸하고 마는 것을 목격하고는 '순수'한 마음에서 캘시퍼와 계약을 하게 되어 캘시퍼에게 자신의 심장을 주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캘시퍼는 '악'인가? 위의 모노노케 히메에서 마을의 우두머리인 에보시가 절대적인 악이 아니듯이 캘시퍼도 악이 아니다. 하울의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계약으로 이후에 서로의 생존을 위한 공존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피는 황야의 마녀의 저주로 마음의 나이에 따라서 겉모습이 변하게 된다. 포스터의 모습처럼. 온전하지 못한 가정 내에서 가장으로써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자신의 젊은 생기를 희생해가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소피의 안타까움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그녀가 꿈꾸던, 매순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삶은 90살 먹은 할머니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다를 바가 없던 것이다. 이러한 소피에게는 자신을 자신의 나이대로 똑바로 바라보는 순수한 눈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울의 심장을 가지려고 했던, 소피에게 저주를 걸었던 황야의 마녀는? 그녀는 나쁜 악이 아닌가? 결말을 보면, 이후 황야의 마녀는 모든 힘을 잃고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이를 소피가 돌봐준다. 황야의 마녀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서 누군가를 해하려 했지만, 이는 결국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 마법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병기가 되는 작품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원인이 아니던가? 즉,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절대적인 악은 없다. 원작은 다르겠지만.
이렇듯 스튜디오 지브리는 월트 디즈니와는 다르게 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을 던진다. 절대적인 악은 없고 이유있는 악이 존재한다는 것, 전쟁은 결과 이전에 과정이 아프다는 것, 불안전한 가정 안에서 소피와 같은 짐을 얹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 등. 아마도 이것이 월트 디즈니와는 차별점이고, 지브리에서만 볼 수 있는 지브리만의 히스토리이자 개성이기에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다른 작품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할 만한 요소가 많으므로 다음 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참고자료]
- 위키피디아
- 사진 출처 :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