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해 백령도의 어딘가에서
“아, 어찌 곡도(鵠島)에 홀로 남겨졌단 말인가!”
당(唐)나라 사신으로 가게 된 양패(良貝)를 따라 나선 게 엊그제 같은데, 육지에서 멀고 먼 서해 곡도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따라 나서질 말걸. 가만히나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했거늘. 가만, 이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더라. 생각하기 귀찮다, 신라로 돌아갈 길도 막막해진 거타지는 풍경 좋은 못 주변에 벌렁 누워버렸다.
“이보게, 내 얘기 좀 들어 주게나.”
무슨 소리지? 주변에 아무도 없을 터인데. 거타지는 놀라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못 위에 백발의 몸가짐이 단정한 노인 하나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게 아닌가. 거타지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누구신데 나이게 말을 거는 것이오? 사람이요, 귀신이요?”
“나는 서해용왕(西海龍王)이라오. 근일 해 뜰 무렵 노승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 우리 가족을 헤치기 시작했다네. 이제 나와 내 늙은 처와 딸 하나만 남았구려. 자네의 활솜씨를 귀하게 여겨 내 일부러 이곳에 남긴 것이라네. 그러니 내 부탁을 들어주게나.”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란 말인가. 거타지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서해 한가운데 섬에 남겨져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거타지는 서해용왕의 말에 따라 노승이 내려온다는 곳에서 기다렸다. 해가 뜰 무렵 하늘이 흐려지고 구름이 춤추더니 정말 노승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거타지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활에 화살을 메기고 때를 기다렸다. 잠시 후 노승이 주문을 읊자 서해용왕과 가족들이 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옳지, 지금이다.’
거타지는 노승의 심장을 향해 있는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쉬이익- 소리를 내며 날라가 노승의 심장에 콱! 박혔다. 노승은 괴성을 지르며 땅 위로 고꾸라졌다.
거타지는 얼른가 자신이 맞춘 노승의 사체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가슴에 화살이 박힌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늙은 여우가 노승으로 변해 용들의 간(肝)을 빼먹고 있던 것이다.
서해용왕은 거타지에게 다가와 고마움을 표했다.
“자 이걸 가져가게. 나의 선물일세.”
“이것이 무엇입니까. 꽃가지 아닙니까?”
“그냥 꽃가지가 아닐세. 내 하나 남은 딸이네. 자네가 신부로 맞이해 행복하게 살도록 하게.”
“내 운은 이제 다 했다 했더니, 혼신을 다한 화살 한 대에 삶이 바뀌었구나!”
서해용왕은 두 용(龍)에게 거타지를 당나라까지 호위하도록 했다. 당에 도착한 거타지는 귀빈으로 환대를 받았고, 신라로 돌아와 꽃가지를 여인으로 변하게 한 후 부부의 연을 맺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
#2 늙은 여우의 심장을 쏜 거타지
[사진] 고구려 고분 무용총 벽화에 그려진 수렵도(狩獵圖). 예부터 활을 잘 쐈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곡도는 서해 최북단의 섬, 지금의 백령도다. 삼국시대에 곡도라 부르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백령도(白翎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백령도는 심청전의 배경이 되는 인당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타지 설화는 작제건(作帝建) 설화의 원형으로도 유명하다. 작제건이 항해하던 중 풍랑이 사나워져 점을 치니, 고려 사람이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점괘가 나와 작제건이 한 섬에 내리게 된다. 섬에 내린 작제건에게 서해용왕이 나타나 부처의 모습을 한 이를 퇴치해 달라하여, 작제건이 ‘부처’를 활로 쏘아 죽이니 그 부처는 늙은 여우로 변하였다. 그 뒤 용왕의 딸과 작제건이 혼인하여 함께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작제건은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로서, 후대 왕건의 조상들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거타지 설화를 활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용이 사람을 구한 게 아니라 사람이 용을 구하는 이야기에서 인간의 지위가 높아지는 문화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신을 뛰어 넘는 존재가 되었다기 보다 인간도 하나의 존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그렇기에 과거 ‘신화의 시대’에 비해 신의 지위가 한층 낮아진 지금의 시대에 더 어울리는 설화라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