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개남상주절의 깊은 밤으로부터
금슬 좋았던 남산국과 여산국 부부는 마흔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동쪽 산 너머 동개남상주절에 시주를 하고 부처님께 석 달 열흘을 빌어 드디어 딸을 얻게 된다. 그 아이의 이름을 지장이라 지었다.
한 살 때 어머니의 무릎에서, 두 살 때는 아버지의 무릎에서, 세 살 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릎위에서 노닐며 집 안의 귀염둥이로 자란다. 하지만 그 행복도 오래 가지 못했다. 다섯 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여섯 살 때는 아버지가, 일곱 살 때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지장은 할 수 없이 외삼촌 집에 머물렀지만 집 안을 잡아먹은 년이라며 구박하길 그치지 않았고, 개밥그릇에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결국엔 외삼촌에게 쫓겨나게 된다.
“어찌 내 명은 이리 박복하단 말입니까.”
고아가 되고 집을 잃은 지장은 길거리에 나앉았으나, 옥황이 보낸 부엉새가 밥과 옷을 구해다 주고 밤이면 지장을 날개로 덮어 키웠다. 지장이 열다섯이 된 해, 지장의 착한 성품을 들은 서수왕이 지장을 며느리로 맞이한다.
며느리가 된 지장은 시집의 사랑을 받아 전답과 마소 재산을 전부 물려받고 아들까지 얻게 된다. 지장을 집으로 들인 후 서수왕 집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행복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지장이 열여섯이 되던 해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열일곱이 되던 해에 시아버지가, 열여덟 해에는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열아홉에는 남편을 여의고, 사랑하는 자식마저 잃는다.
“가혹하고 또 가혹합니다. 내 전생의 업이 무엇이 길래 이리 삶을 고되게 한단 말이오.”
시누이 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지장은 시누이의 고된 구박을 받아야만 했다. 지장은 모든 걸 체념하고 몇몇 옷가지만 추린 후 집을 나온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억새, 속새를 베어 움막을 짓고 살았다.
어느 날 주천강 연못으로 빨래를 하러 가던 길에 만난 중에서 지장은 자신의 사주를 봐달라 했다. 중은 죽은 친부모와 시부모, 남편, 아들을 위해 전새남굿과 후새남굿을 하고 일러준다.
“내 그리하여 나의 업을 풀 수 있다면 그리하겠소.”
지장은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쳐 명주실을 잣는다. 명주 열 필을 짠 후 친정할아버지, 친정할머니, 친정아버지, 친정어머니한테 한 필씩 올리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낭군님, 아기한테 한 필씩 올린 다음 남은 명주 두 필은 굴장삼 짓고 고깔 짓고 바랑까지 지어 지장스님이 되었다.
지장은 죽어서 새의 몸으로 환생하는데 살아 어찌나 고통이 심했는지 머리에서는 두통새, 눈에서는 흘그새(흘깃흘깃하는 새), 코로는 악심(惡心)새, 입으로는 혀말림새(부부살림을 갈라놓는 새), 가슴에는 이열새(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새)가 나왔다고 한다.
#2. 인간사 액운을 막아주는 지장아기
제주도의 큰굿 중 ‘시왕맞이’ 및 ‘양궁숙임’ 제차에서 구송되고 있으며, 작은굿으로는 ‘거무영청대전상’이란 굿에서도 구송되는 <지장본풀이>(본풀이는 ‘본(本)을 푼다’라는 뜻으로 대체로 신(神)의 내력담을 말한다).
사람에게 해(害)한 새로 환생한 지장의 내력과 그 새를 쫓아내는 언사로 마무리되는 <지장본풀이>는 일종의 액막이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장의 기구하고 슬픈 삶을 살펴보았을 때 그녀가 신격화 되어 액막이 역할을 하는 건 역설적이라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무속신화 주인공들은 시련 끝에 결국 일정한 권역을 관할할 수 있는 신이 되지만 지장아기씨는 비극적이게도 사람들이 거부하고 쫓아내고자 하는 새[邪], 즉 새[鳥]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새[邪]는 원래 굿에서 신이 제청에 들어올 때 함께 따라오는 사기(邪氣)와 부정(不淨)한 것을 가리키지만 발음상으로 동일하게 ‘새’라고 부른 것이 결국 관념적으로도 ‘새[鳥]’와 동일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지장본풀이> 참고).
<지장본풀이>는 제주도의 다른 일반신본풀이와 달리 결말에서 주인공의 신직(神職) 좌정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전새남굿과 후새남굿으로 업을 풀고 스님이 되어 공덕을 쌓지만, 마지막까지 사람이 쫓아내야 하는 ‘새’[邪/鳥]가 된 지장의 이야기엔 우리나라의 정한(情恨)의 정서가 담겨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