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1. 옛날 어느 늦은 밤, 충남 보령 도화담 마을 즈음
밤이 깊어 깨어 있는 이 하나 없는 시간, 사내 하나가 마을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마을에서 이름난 효자였던 황씨는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황구(黃狗)의 간을 구해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황씨는 깜짝 놀랐다. 아내가 잠도 자지 않고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씨는 적잖이 당황했다. 자신이 밤에 돌아다니는 사실을 아내가 눈치 챈 진즉 알았으나, 이렇게 마주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마주쳐선 안 됐다.
“이보게, 이 시간에 안자고 뭐하고 있나.”
“서방님을 기다렸지요. 밤마다 어딜 돌아다니나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오늘에서야 이렇게 본 모습을 보게 되네요.”
“숨길 생각은 없었소. 이게 어디 자랑거리가 돼야지. 어머니의 병이 다 나으면 말하려고 했지만....... 미안하게 되었구랴.”
“괜찮습니다. 내 서방님이 그 흉측한 모습을 다신 못하도록 요망스런 책을 아궁이에 불살랐으니, 이제 두 번 다시 호랑이로 둔갑하진 못할 겝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소! 책을 태워?!”
몇 년 전, 황씨는 집으로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에게 어머니의 병을 고칠 방법을 일러주길 간곡히 부탁했다. 스님은 황구의 간 천개를 먹으면 병이 나을 거라고 일렀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황씨는 도저히 천 마리의 황구를 구할 수 없기에 스님에게 다시 간곡히 부탁했다.
“스님 제가 도저히 황구의 간 천 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 다른 방도가 없겠습니까.”
“그대의 효심이 지극해 내 방도를 하나 일러주겠네. 이 책을 보면 호랑이로 둔갑할 수 있을 걸세. 호랑이로 변해 황구의 간을 구하게.”
그 후 황씨는 아내에게 숨긴 채 몇 년 동안 밤마다 호랑이로 변해 황구를 사냥해왔던 것이다.
“서방님이 밤마다 그 요사스런 책을 보고 호랑이로 변하는 걸 다 봤습니다. 어머니를 위한다지만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일입니까?”
“그 책이 없다면 사람으로 돌아갈 수가 없단 말이오!!”
황씨는 화가 나 크게 울부짖었다. 황씨의 울부짖음이 온 마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고, 가까이서 울린 호랑이 울음소리에 마을사람들은 겁을 먹고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이젠 서방님이 사람인지 금수(禽獸)인지 구분이 안갑니다. 사람으로 못 돌아올 거면 당장 마을에서 나가시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황씨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목덜미에는 커다란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내가 정말 짐승이 되어 가나 보다.”
그 길로 마을을 떠난 황씨는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다 인간의 본성을 잃고 사람을 해하다 포수들에게 잡혀 생을 마감하게 됐다.
#_2. 효자 호랑이 황팔도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최남선은 조선의 범 이야기로만 <천일야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호담국(虎談國)’이라 말했다. 호랑이에 대한 설화가 그만큼 많다는 건 과거 한반도에 호랑이가 꽤 많이 서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백두산 호랑이가 유명한 건 괜히 지어낸 말이 아니며, 한반도의 형상이 호랑이를 닮았다는 말도 그냥 듣기 좋으라고 만든 말은 아닌 것이다.
황팔도 설화는 구전되는 지역, 문화, 인물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를 취한다. 이 글에서 어머니의 병을 고칠 방도를 알려준 기인(奇人)이 스님으로 나타나지만, 또 다른 이야기에선 황팔도가 어머니의 병을 고쳐 달라 치성을 드리던 중 꿈속에서 만난 노인이 책을 건네줬다고 나타난다. 추후에도 계속 언급되겠지만 우리나라 민간 신앙이 불교와 도교에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두 가지 기인의 형태가 되겠다.
그리고 황팔도가 보고 호랑이로 둔갑했다는 책은 주역이라 언급되는 경우도 많다. 주역이라면 우리나라 사주팔자관상손금, 철학관 등등에서 사용하는 서적이다. 주역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 알려졌으며, 그 난해함으로 인해 신비감을 주는 유교의 경전이다.
이제 진짜 전설이 된, 여름마다 찾아왔던 <전설의 고향> 시리즈에서도 아주 유명한 ‘내 다리 내놔’를 혹시 기억하거나 아는 사람이라면 이 황팔도 설화와 비교해보면 좋을 것 같다. 같은 효자 이야기이지만 한 명은 해피엔딩을, 다른 한 명은 새드엔딩을 맞는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황팔도의 부인이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황팔도에게 진저리가 나 일부러 책을 태워버렸다는 설화가 전해지기도 하며, 황팔도의 행위가 타인의 재물을 해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짐승’의 형태로 효도를 행했기 때문에 그 대가를 치뤘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내 다리 내놔’에서는 시체를 훼손해도 해피엔딩이었는데.
어쨌든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았기에 황팔도의 설화에서 비극적인 면모가 두드러져 더 인간적이고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전해지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