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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찌질이와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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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jpg

 

 

열여덟 살 때 였던가요, 광화문 교보를 들렀다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입했습니다. 계기는 너무 단순했어요. 사춘기 무렵에 니체는 특수한 학문적인 가치 때문에 아니라 어쩐지 이런 책들을 끼고 있으면 그럴싸해 보일 것 같고 지적인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죠. 고등학생 나부랭이 따위가 고전문헌학 역사로는 오늘날 까지 독보적인 존재인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가 병환을 앓으면서 절치부심 써낸 역사적인 철학책 따위를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 리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100여년의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곡해되기도 하고 몇 번이나 죽었다 살아났던 니체였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니체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나서 드디어 한국에서 니체 전집에 대한 번역 기획이 시작됐고 그 이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출간됐다는 기사를 읽었던 모양입니다. 요새도 대형서점 철학 코너에 가면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짙은 갈색의 하드커버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니체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는 바로 그 책 말이죠.  

 

 

 

크기변환_Portrait_of_Friedrich_Nietzsche.jpg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산을 내려오는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도시에 내려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광대를 보고 손가락질 하는 보통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당시에 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심증만이 있었죠. 줄타기를 하던 광대는 줄에서 떨어져 죽고 맙니다. 죽은 광대를 향해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이야기가 퍼질 때가 되지 못했음을 알고 광대의 시체를 엎고 산으로 오릅니다. 1장의 내용입니다. 낙타와 사자와 아기의 이야기도 여기서 나옵니다. 저는 그때 1장만 읽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더 진도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괴짜같은 사춘기를 보냈던 내게 이 놀랍고도 비유적인 이야기는, 단순히 그것을 읽어낸다는 사실 만으로도 남다른 사람이 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지금 동기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동기가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작할 때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런 사람들의 외면이죠. 니체를 읽는 사람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내는 모습 혹은 내 자신이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이 된다는 바로 그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출발점에 서게 하는 매우 큰 동기라는 겁니다. 저는 천재적인 사람도 대단한 사람도 되지 못하는 까닭에 누구는 말하는 시작부터 놀랍도록 대단한 그런 동기를 갖지는 못했습니다. 훗날 알게 되지만 고작해야 낭만주의적 전통 속에서, 광인 철학자의 한 상(象)에 매료되었던 것뿐이죠. 

 

 

 

다음 어느 편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때 순진하고 허영심 강한 사춘기 소년은 니체를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이론적으로 니체 철학의 가치는 철학의 분과 중에서 윤리학에 있습니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고전학자였습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전통 속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 적인 것들의 대립을 발견했습니다. 이 발견을 기반해 당대 유럽이 처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대립이란 불합리, 아름다움, 충동과 같은 면과 합리, 절차, 이성과 같은 면들의 대립을 의미하는데 기독교가 중심이 된 문명은 디오니소스적인 것들을 파괴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스스로 노예가 되도록 만들었다고 본거죠. 이는 다른 한 편에서 절대불변이라고 믿어지는 도덕과 윤리가 변화하는 대상이며 역사성을 가진 무엇이라는 것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이런 노예적 상태를 벗어나서 그 스스로 위대해지는 사람들이 바로 Übermensch, 즉 초인이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 초인의 등장과 그 의미를 밝히는 저서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들에 관해 또는 거의 알지 못한 채 그저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흉내를 내듯 니체의 산을 오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불필요해 보이는 서언을 늘어뜨리는 이유는 이런 사소하고 유치한 동기가 저로 하여금 인문학에 대한 발을 딛게 원인이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문학이란 너무도 손쉽고 별 것 아닌 동기에 의해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선생님과 좋은 동지들이 많이 있었다면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깊숙이 이 세계에 익숙해질 수 있었겠지만 저는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기실은 지적인 건강함과 발전의 매우 중요한 근거인, 질문을 택할 수 없었던 고집불통의 소년이었습니다. 대신 그렇게 어설프게 출발하고 누구의 도움 없이 출발한 덕에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을, 그 헤맴 속에서 인문학의 세계에 더욱 손쉽게 접근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위키피디아 영어판에서 인문학, 즉 Humanities를 검색하면 자연과학과 분리되는 인간의 문화와 역사에 관련한 학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후에 다루겠지만 인문학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매우 서구적인 개념으로 다른 서구 문화의 중추들처럼 고대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개념입니다.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저술가, 연설가였던 키케로는 인문학을 삶의 기쁨과 발전을 위해 인간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위키피디아는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어원학적으로도 인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Homo와 연관관계가 있다고 하니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얼핏 느낌이 오시리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학자들의 정의와 무수한 전공생들의 정의가 있겠지만 명백한 도움이랄지 동무들의 도움 없이 천천히 돌고 돌아 제가 얻어낸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정의는, 매우 많은 훌륭한 사람들의 각종 정의의 일부 교집합과 제 경험의 교집합 속에서 얻어낸 정의는 결국 인생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란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학문이라는 특수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에 관해 탐구하는 그 행위가 바로, “인문학 하는 상태”가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니체를 읽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150년 전 살았던 자연인이 세계를 읽어낸 것을 발견합니다. 어떤 인간이 어떤 세계를 살아내면서 발견한 인간의 모습은 그의 책 속에 살아있습니다. 어떤 내용은 종종 인간이 이렇다고 하는 사실을 모상하고 어떤 이야기는 인간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론가들은 니체와 그의 사상이 놓여야 할 문맥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런 분과 학문의 세세한 점들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잠시 동안 니체의 세계 속에서 니체가 살아낸 세계와 그 인간들을 만나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나 역시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내는 한 사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종종은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불분명하지만 내 자신의 세계에 와 닿는 문장이 있습니다. 종종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지만 종종은 그 문장들과 파동들 속에서 나는 내 인생에 관해 다시금 생각합니다. 니체의 초인이 난폭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니체의 초인이 완벽한 인간의 이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판단으로 가는 길 안에서, 고민들 안에서 나는 이미 인문학 안에 있는 상태에 있게 됩니다.  

 

 

 

첫 회에 인문학이 썩 유용하지 않고 때론 불필요하다고 말한 점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떤 상태에 빠져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상태에 처해있는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멀찍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바다의 풍광에 놀라지만 바다 속에 빠져든 사람은 다만 바다가 깊고 또 이 깊은 바다 속에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함’의 상태는 끊임없는 고민과 괴리의 연속 속에서 내 자신이 어디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나도 모르게 많은 것을 하고 있게 되는 상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고민이 축적될 때 나는 내 인생에 관해 조금 더 폭 넓은 이해를 그리고 이해를 통한 용서와 더 나아가 통제와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기까지 가는 길은 다양한 통로와 이유와 방식들로 가득한 것이지요. 제가 처음 어설프게 니체를 만났던 그 순간처럼요. 

 

 

 

 

- 사진 출처 : 예스24,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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