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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청춘 _ 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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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나라 안팎을 떠들썩케 했던 “안녕들 하십니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이 안 난다면 뉴스야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 돌아가는 일 따위 애초에 내일 아니니 관심 없는 분들이거나 구태여 그런 일에 관심 가질 만큼 여유롭지 못한 분들일 텐데, 이 글을 읽게 되시는 분들 가운데는 아마 그런 분들이 없지 싶습니다. 인문학 운운하는 것이 지나가는 유행처럼 보이는 마당에 재삼 인문학과 청춘을 연관 짓는 이런 글을 찾아보실 정도라면 어지간히 사회문제랄지 혹은 어쩐지 진지해보이거나 그럴싸해 보이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갖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실테니까요. 본론으로 돌아와 봅시다. 그렇다면 안녕들하십니까는 왜 우리 사회에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를 일으켰을까요? 

 

  

 

꾸미기_platon-aristoteles.jpg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의 플라톤(좌)/아리스토텔레스(우)>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인간의 삶은 정치적인 삶과 철학적인 삶으로 나뉜다. 단국대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하신 정치학 제 7권 2장에서 나오는 문장입니다. 전공생들처럼 그리스어 라틴어를 막 파서 다 아는 게 아니니 원어가 궁금하시면 번역하신 천병희 선생님께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방법이지 싶네요. 이때 정치적인 삶과 철학적인 삶이란 각각 사회에 참여하는 실천적인 삶과 이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조의 삶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인문학이 아닌 언론학을 전공한 제 해석을 덧붙이자면 이러한 두 삶의 양식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두 양식을 대변합니다. 요컨대 도전하는 삶과 안전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 실천에 참여하는 삶과 개인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삶 등등이요. 

 

 

 

모든 인간은 삶이 추락하기 전까지, 가능성과 꿈이 비현실이고, 내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은 놀랄 정도로 많고 그래서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닫기 전까진 실천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더 정의로운 삶을 꿈꾸고 하는 것들 말이죠. 정치적인 삶과 철학적인 삶을 보라색과 초록색의 보색 대비라고 한다면 아직 꿈이 실현 가능할 때까지 인간의 삶은 정치적인 삶이 더 큰 지분을 차지해 보라색이 가까운 검정색이 되지만 가능성이 희박해질수록 철학적인 삶, 안온하고 자족적인 삶의 비율이 넓은 녹색에 가까운 검정색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값이 급격하게 오르고 있다는 제주도에서 아이들 낳고 오순도순 산다거나 귀농해 삶의 안정과 평화를 찾으려 드는 등의 자족적이고 안전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죠. 

 

 

 

“안녕들 하십니까” 가 우리의 삶을 흔들거나 최소한 불편하게 한 것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요동치는 실천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의 균형이 외부의 외침에 의해 동요하고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느 본능은 나로 하여금 세계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철도 민영화를 찬성하든 하지않든 노동자들의 처우에 관심을 갖든 갖지않든 내 자신이 살아온 문맥과 역사가 만든 ‘나’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를 만들어 가는 작용 속에 동참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 나의 삶은 팍팍하고 고됩니다. 토익 점수와 오픽레벨은 천당행 티켓 같아 보이지만 물론 이 티켓을 갖는다고 천당에 도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 티켓을 갖지 못하면 천당은 쳐다 볼 수도 없죠. 공모전이며 대외활동, 학점까지 천당으로 가기 위해 클리어 해야 할 미션은 많고도 어렵습니다. 이런 판에 나는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런 실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습니다. 민영화가 옳든 그르든, 그건 에라이 나는 모르는 문제, 녹색이 나를 지배합니다. 사적이고 편안한 삶, 개인주의적이고 목가적인 삶을 추구게 되는 것이죠. 물론 그 목가적인 삶을 위해 우리 자신은 너무도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지만요. 

 

 

 

이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너무나 넓게 심지어는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24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가 있었고 성인 남성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으며 이 성인 남성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했던 세상에 살았습니다. 여성은 아이 낳는 도구에 불과 했고 소년과 남색하는 것을 고상한 취미로 여기던 사람들의 세상이었습니다. 그가 말한 철학적 삶과 정치적 삶을 수천 만 명이 메트로한 생활권을 형성하고 남녀뿐 아니라 모든 시민이 동등하게 평등한 존엄을 보장 받으며 시민으로서 지위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 절대당위인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똑같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오래된 생각이, 우리와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냈던 사람의 언어가 오늘날의 삶에도 영감과 깨달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24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면면이 이어 존중되고 전승돼왔다는 점입니다.

 

 

 

어느 후배가 묻습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이 무엇이냐? 저는 대답합니다. 내 기준은 세 가지다. 하나, 50년이 넘은 책. 둘, 그림이 없는 책. 셋, 한국인이 쓰지 않는 책.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그림이 많은 책은 저자의 역량을 의심하게 하고 저는 문학이 아닌 이론서를 보기 때문에 대체로 번역서를 읽게 되는 까닭입니다. 중요한 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저는 책을 빌려 보지 않습니다. 책을 지저분하게 보고 또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기 때문입니다. 책은 재산 입니다. 그러니 기왕에 살 책이라면 아깝지 않은 책을 사야 할 것인데 도무지 어느 것이 좋은 책인지 구별이 안 간다는 말이죠.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가사와 선배가 시간의 세례라는 단어를 썼던가요. 비슷합니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나 동의를 혹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유효한 문제의식을 그래서 논쟁의 대상이 돼왔다는 뜻이니까요. 고전이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위대함과 추악함을 함께 버텨낸 역사이고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2400년을 살아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요. 인문학이 다루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인간이 가졌던 무수한 의문과 그 해결책들, 그리고 고민의 언어들. 그것이 인문학입니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문학과 역사, 철학으로 흔하게 구분되지만 그 심층은 동일합니다. 그러니 지혜와 통찰력을 길러 줄 밖에요. 

 

 

 

그치만 무시하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답이 애매모호하고 도무지 선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살아온 역사와 문맥, DNA배치도 다릅니다. 똑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읽어도 전혀 다르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다르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남겼던 그 멋들어지고 대단해 보이는 언어들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가 될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재화의 교환에 의해서 작동되는 체제입니다. 선명하지 않은 것은 무가치해집니다. 자본주의의 물신성은 바로 이런데서 출발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인문학이 의미가 없거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쉬운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특성을 가진 한국 사람들에게 이는 더욱더 두드러지는 점입니다.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고 보이는 그 무엇도 획득할 수 없다면 그래서 그런 것들이 불만족스럽다면 가시던 길을 가시면 됩니다. 그런 분들의 삶에 인문학은 어차피 큰 가르침을 주지 못합니다. 그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것들에 충실하셔도 인생은 충분히 풍부해집니다. 마찬가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진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시던 분들도 가시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인문학이 가르치는 것은 절대진리가 아니라 절대진리가 없다는 것이기 쉽거든요. 우리는 조금 더 가볍고 손쉬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뭘 하는지 모를 때 많은 일을 하는 법입니다. 그저 유명한 학자 이름을 대면서 말싸움에서 승리하고 싶다, 혹은 지적이고 진지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아님 그저 읽을꺼리가 없다, 남들 다 읽는다는데 나도 유행에 뒤처지기 싫다, 그냥 그렇게 출발하시면 됩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이 글들은 제가 20대를 살아내면서 읽어낸 책들과 내 청춘들 속에서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차지했는지를 찬찬히 늘어놓는 글입니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벗과 동무들에게 그 이야기를 나누는 조금 가볍고 어쩌면 조금 진지한 글들입니다. 그러니 소개팅 나가는 마음으로 약간의 긴장감과 애완견과 동네 산책하는 기분으로 약간의 가벼운 차림새로 그렇게 동참하시면 됩니다.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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