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옛 영남 함양 고을 위성관에서
어느 가을, 영남으로 안찰(按察)을 간 김모는 함양에 이르렀다. 손님을 맞은 향리는 술자리를 만들고 기생을 불러 대접하려 했으나, 이를 다 물리치고 홀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 청했다.
덜컹.
밤이 깊은 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인기척이 느껴졌다. 김공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어둠 저편으로 사람인지 아닌지 모를 것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거기 사람이오, 귀신이오?!”
“귀신이 아니오. 사람이오.”
“그럼 어찌 깊은 밤 사람을 이렇게 놀랜단 말이오.”
김모는 방 안의 불을 밝히려 했으나 검은 덩어리의 사람이 급구 말렸다.
“불을 켜지 말아주시오.”
“왜 불을 켜지 말란 말이오.”
“내 모습을 보면 필시 크게 놀라고 말 것이니, 그냥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오.”
“그렇게 청한다면, 그리 하겠소.”
한 밤 중 김모의 방에 찾아온 사내의 사연은 이랬다.
그는 본래 경상북도 상주에서 주서 벼슬을 하던 우씨 성의 사내였다. 중종 때 명경과에 급제해 경성에서 벼슬을 살고 있을 때, 정암 조광조에게 여러 해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조광조와 관련된 사람들이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우씨 경성으로부터 도망쳤으나 고향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그대로 지리산 첩첩산중으로 들어가 여러 날을 굶고는 참지 못해 계곡 주변의 풀과 열매들을 따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이렇게 오륙 개월을 지내고 나니 온 몸에 털이 나 길이가 수촌에 달했고, 걸음이 가벼워 높은 절벽을 넘고, 힘이 강해져 맹호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딱 괴수이니 세상일이 궁금해도 지리산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왔소. 별다른 뜻은 없고, 정암 선생의 집안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할 따름이라오.”
“정암은 인조 모년에 신원(身元)되었고, 자손 몇몇은 특별히 조정에 발탁되고 임금이 서원을 곳곳에 내려주었으니 남은 여한은 없을 것이오.”
“잘 된 일이 되었소.”
“그런데 처음 도망칠 때가 몇 살이었소?”
“삼십 오세였소이다.”
“지금이 기묘로부터 거의 삼백 여년이 지났으니, 우씨의 나이가 사백 살에 가깝소이다.”
김공은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할 게 없어 다음 날 밤에 다시 만나길 약속했고, 우씨가 다시 찾아오자 많은 과실을 대접했다.
김공은 우씨와 만났던 일을 평생 발설하지 않다가, 임종에 이르러서야 글로 남기게 되었다.
#2. 조광조의 안위를 물은 털사람
<이미지 출처 : KOCCA 문화콘텐츠닷컴>
기묘사화는 1519년, 중종 14년에 일어났다. 기묘사화의 결과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주요 인물들은 유배된 후 죽음을 맞이한 사건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한 우씨는 기묘사화를 피해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삼백년 이상을 산 사람이다.
온 몸에 털이난 남성을 모인(毛人) 또는 모선(毛仙), 여성을 모녀(毛)라고 불렀다. 이들은 히말라야에 산다는 설인(예티, Yeti)처럼 괴수가 아니라 일종의 신선에 해당한다.
신선이 되기 위한 수련 방법으로 호흡과 명상을 통한 내단(內丹)수련법, 남녀 음양조화를 통해 불로장생을 꾀하는 방중술(房中術), 경정과 주문을 암송하는 방법 등이 있다. 그리고 특정한 영약을 먹고 신선이 되는 복식법(服食)이 있는데 우씨는 복식법을 통해 선인이 된 케이스라 보면 좋을 것이다.
우씨 이야기 외에도 여러 편의 ‘모인(毛人)’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길 잃은 서생을 도운 모인, 해송씨앗을 먹고 한 자 길이의 푸른 털이 자랐다는 모인, 백두산에서 잡힌 모녀이야기 등등. 신선사상은 본래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나 우리나라에도 넘어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신선이라 함은 깊은 산속을 거닐며 근심걱정 없이 유유자적할 것 같지만 우리나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인들은 속세와의 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종교, 신앙적 의미에서 신선들이 점점 세속화되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을 테고, 우연찮게 신선이 된 이들이 결국 인간성을 버리지 못한 채 회의적인 삶을 사는 모습의 반영일 수도,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