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옛날 제주도 조천읍 와산리 어딘가
“큰딸년아, 내 뒤 귀썰매를 걷어보아라. 어쩐 일인지 귓등에 고랑니(이)가 끓는 듯 가렵구나.”
“어머님아, 귓등을 걷어보니 고랑니는 없고 귓밥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귓밥을 내어다오.”
큰 딸과 ‘검은 땅 밭’에서 밭을 매던 송씨 할매는 아침부터 귀가 자꾸만 가렵고 답답했다. 몸도 쑤시고 기운도 없고 날도 더운데 이놈의 귀까지 난리날 건 뭐람. 힘든 밭일을 잠시 쉴 겸해서 큰딸을 불러 귀를 파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딸은 나뭇가지를 꺾고 송씨 할매를 무릎에 눕힌 뒤 조심스레 귀를 파주었다. 송씨 할매는 나른해져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야!”
송씨 할매가 버럭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큰 딸은 기겁했다. 실수로 귀청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가슴에서부터 짜증이 확 밀려 나온 송씨 할매는 욱한 마음에 큰 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년 난 것! 저년 난 것! 도둑년 난 것! 지 애미 죽으라고 귀청을 쑤시는 년 어디 있겠느냐. 벼락맞을 년!”
그때였다. 송씨 할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쳐, 큰 딸이 벼락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한 송씨 할매는 검게 타 죽은 큰 딸을 바라보다 이윽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한 사내가 송씨 할매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니, 왜 이렇게 서러이 통곡을 하오? 방금 벼락을 맞아 죽을 년이라 하지 않았소?”
“그게 어찌 진짜로 한 말이겠소. 내가 잠시 화가 나 그냥 내뱉은 말이오!”
“너무 섣불리 힘을 써버렸구나!”
사내는 아차! 싶었다. 그가 벼락 몽둥이를 휘둘러 딸을 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내의 이름은 화덕진군(火德眞君)이었다.
송씨 할매의 통곡은 14일 동안 멈추지 않았다. 이 통곡소리를 들은 옥황상제는 화덕장군의 벼락 몽둥이, 벼락, 벼락틀 등을 빼앗았고, 화덕진군은 땅 위에서 살게 되었다.
벼락은 사라졌지만, 화덕진군이 가는 곳마다 줄불이 났다. 마을에 불이 마을 사람들은 불도당 제단을 마련하고 화덕진군에게 제를 지냈다. 그러자 더 이상 마을에 불이 나지 않았다.
#_2. 불과 아궁이의 신, 화덕벼락장군
<이미지 출처 : KOCCA 문화콘텐츠닷컴>
그리스 신화에서 불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화덕진군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화덕진군, 화덕장군으로도 불리는 이 신은 불을 관장하는 신이다. 육지에서는 부엌의 아궁이를 포함해 모든 종류의 불을 관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주도에서는 불이 난 후 ‘불찍앗음’이라는 굿을 열어 허수아비를 작대기로 두들긴 후 멀리 내다 버린다고 한다. 허수아비가 바로 불을 낸 화덕진군을 상징한다.
특히 제주도에서 나타나는 이야기의 특징은 화덕진군이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벼락을 쳐 징벌을 하는 형태까지 띄고 있다. 그러나 화덕진군은 벼락을 빼앗긴 후 불을 관장하는 신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인간의 문명발달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 과거 벼락이 인간에게 큰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었으나 인간들은 차츰 벼락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고, 불은 인간에게 여전히 중요하기에 숭배의 대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야기에 송씨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제주도에서 송씨들이 아니면 옹기를 구울 수 없고, 송씨들의 대장장이 솜씨가 독보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덕수리에서는 농기구인 볏과 보습을 주로 만들었는데, 제를 지낼 때는 반드시 송씨가 초헌관이 되어서 제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제주도의 송씨들과 얽힌 불의 이야기와 화덕진군의 이야기가 얽혀 ‘벼락 맞아 죽을 년’이란 ‘욕설’의 유래가 되는 설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